컴파스와 자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글꼴(font)를 디자인하는 것에 중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말인지... 처음부터 꼬이네)
수학공부를 하는데에 컴파스와 자 만을 사용해서 작도하는 것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흥미로운 주제였고, 기하학의 주제만이 아니라, 대수학의 주제로 되기도 한다.
(예: 3대 작도 불가능 문제. 이 문제의 불가능성이 어떻게 증명되었는지, 그리고, _( 대수학적인 수 )_ 라는 것의 성질과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수와의 구별 및 관계 등등...)
처음 찾게 된 것이
$ \TeX $ System 에서의 font engine인 METAFONT 자료를 찾다가, 고대 또는 근대 유럽에서 글꼴을 도안할 때에 곡선은 컴파스를 사용하고, 직선은 자(ruler)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떠오른 것이 고대 그리스의 작도 문제와 기하학 또는 제도법을 처음 배울 때 언뜻 들었던 것 같은, 임의의 각도는 3등분하는 (컴파스와 자(눈금없는 자)를 사용한 작도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명제 (또는 안내)를 들었던 기억이 떠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Grothmann 아저씨가 만든 C.a.R.(Compass and Ruler)라는 기하학을 배우기 쉽게 해 주는 멋진 프로그램도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구글에서 '컴파스와 자를 사용하는 그림그리기'를 영어로 검색해 보게 되었다.
_( Compass-and-straightedge construction )_ 구글에 _( compass and )_ 를 입력하니, 나머지 부분은 검색 제안이 떠서 보여 주니, 쉽게 ruler 를 그냥 straightedge 로 바꾸게 되었다. 그 내용에 감탄하던 차에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도 있겠고, 보고 싶어져서 한국어 페이지도 보게 되었다.
_( 컴퍼스와 자 작도 )_ .
3대 작도 불가능 문제와 관련된 글에서는 대수적인 수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제는 대수(대수; algebra)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전에 올린 것과 같은 한국어 Wikipedia의 대수학의 설명에 난해한 부분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참고:
작도 가능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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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30일 수요일
위키피디아-한국에서 수학글을 읽다가 이해 안되는 내용...
고전적인 대수학에서 상당히 거리가 추상화되어 있으며,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언급이란 말인가...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8C%80%EC%88%98%ED%95%99&diff=prev&oldid=13704988
__역사__ 단락에서의 맨 마지막 문장인,
(이전 생략)....
이후 현대 수학에서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리주의나 니콜라 부르바키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고전적인 대수학에서 상당히 거리가 추상화되어 있으며, 방정식의 해법은 '방정식론'(대수방정식론)이라는 대수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알 수 없는 말이다.
위키피디아의 _( 대수학 )_ 내용의 글에 있는 내용이며,
처음 등장한 때는
판부터 그 이후의 내용에 쭈욱 등장한다.
이 토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하려나? OTL
위에 언급한 것보다 더 이전의 내용에 처음 나온 판을 찾았다.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8C%80%EC%88%98%ED%95%99&diff=next&oldid=12469180
이 사이 (i.e. 2014년 8월 15일 편집 에서 2015년 3월 1일 편집판까지 계속 지워지고, 다시 되돌려지고, 붙여지고 등등을 반복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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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도대체 무슨 언급이란 말인가...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8C%80%EC%88%98%ED%95%99&diff=prev&oldid=13704988
__역사__ 단락에서의 맨 마지막 문장인,
(이전 생략)....
이후 현대 수학에서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리주의나 니콜라 부르바키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고전적인 대수학에서 상당히 거리가 추상화되어 있으며, 방정식의 해법은 '방정식론'(대수방정식론)이라는 대수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알 수 없는 말이다.
위키피디아의 _( 대수학 )_ 내용의 글에 있는 내용이며,
처음 등장한 때는
2015년 2월 15일 (일) 19:01 판 (편집)까지는 없다가,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
2015년 3월 1일 (일) 07:25 판 (편집) (편집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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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침해 내용 삭제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UgRB&articleno=649&categoryId=13®dt=20130725174531 Jy971015(토론)의 13250317판 편집을 되돌림)
판부터 그 이후의 내용에 쭈욱 등장한다.
이 토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 하려나? OTL
위에 언급한 것보다 더 이전의 내용에 처음 나온 판을 찾았다.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EB%8C%80%EC%88%98%ED%95%99&diff=next&oldid=1246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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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8일 화요일
수송과학기술협회 정보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보던 '학생과학' 잡지 발행처) 갱신
나는 어렸을 때에 _(학생과학)_ 이라는 잡지를 보고 자랐다.
사서 본 적은 한번도 없었고, 친구들이나 형들이 어디에선가 빌려 오거나, 학교에 가져 오거나 하면 많이 읽었었다. (기껏해야 1년에 1-2권 정도?) 어떤 책은 형님이 사서 본 적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정도는 그 속에 있던 종이 비행기 접기를 내가 뜯어서 만들었던 적도 있는데, 남의 책을 뜯었다고 혼난 적이 없었으니까...
거기에 발행인이 _( 수송과학기술협회 )_ 라는 조금 이상한 이름을 가진 단체였었다. ( 과학기술을 수송한다고?? )
내가 책을 가끔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중학교 쯤) 이 책을 발행하는 곳이 '중앙일보'로 바뀌었고, 그 이후로는 이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그냥 보통 어린이 잡지 정도(만화와 괴기등의 주로 꾸며졌던 것. 중요한 것은, 만화도 재미없는 내용으로..)로 바뀌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한번 사서 봤는데, 중앙일보로 바뀐 이후였고, 그 내용에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몇년 지나지 않아 이 중앙일보의 학생과학 잡지 마저 볼 수 없게 되었다. 서점에서 사라진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이 수송과학기술협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얼마전부터 구글 검색이 강력했지만, 궁금해질 때마다 검색을 했지만, 별다른 내용이 잡혀오지 않았었다.
오늘 인터넷에서 좀 다른 이름이지만 비슷한 이름인 _(수송 미디어)_를 접하게 되어서 다시 _( 수송과학기술협회 )_를 검색해 봤고, 지난번과 달리 약간 내용있는 정보를 찾아내게 되었다.
_(구글검색: 수송과학기술협회 )_
이 중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있던 내용을 아래에 복사해 둔다.
학생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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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중앙일보의 1974년 기사도 올린다. 내용이 너무 좋다.(ㅎㅎ)
1974년에 연간 7백만원이라는 적자라면, 엄청난 적자인 것이다.
좋은일을 하면서 이렇게 고생한 분이 있었다는...
『장차 이 나라의 역군이 될 어린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과 소양을 길러 주려는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고. 3월호로써 지령 l백호 특집을 낸 『학생 과학』 발행인 남궁호씨(32)는 간행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남궁 사장은 연간 7백만원 이상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잡지 발행을 고수해 온 것은 『마땅한 놀이터 하나 없는 학생들이 좋지 못한 곳에서 용돈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과학 「클럽」 활동에 참여하고 유익한 잡지를 읽어 여가를 선용하면서 과학 기술 연구에 취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했다.
65년 10월에 『학생 과학』 창간호를 냄으로써 일찌기 전국민 과학화 운동에 앞장서 온 남궁씨는 대학교(연세대 물리과) 3학년 때에 『학생 과학』을 창간하고 직접 삼륜차를 운전하여 잡지를 배달했다고 주위에서는 말한다.
『당시 학생이 잡지를 낸다고 하니 모두 다 응하지 않아 애를 먹었으나 열심히 설득하니까 결국 모두 협조해 주더라』고 어려웠던 초창기를 회고했다.
앞으로 역점을 둘 사업에 대해 남궁씨는 『학생들이 과학 기재를 직접 보고 부수고 만들 수 있는 학생 과학관을 세우고 학생 과학 「클럽」 활동을 적극 지원, 확장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과학 세계사는 이번 『학생 과학』 지령 1백호를 계기로 과학기술처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수송과학기술협회로 재출발, 『학생 과학』 외에도 과학 기술 서적 발간, 과학 기술 연구 발표회 및 강습회, 청소년 과학 「클럽」 활동 등에 더욱 힘쓰겠다고. 『그 동안 외부 원조 없이 해 왔지만 과학계 인사들의 성원 덕택에 용기를 얻었다』고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 지도 편달을 바란다』고 말끝을 맺었다. 남궁호씨는 남궁련씨의 외아들이다. <이운철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호를 낸 『학생 과학』사장 남궁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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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동아 사이언스 라이브러리의 기사도 일부 발췌했다. 이것은수송과학기술협회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_( 한국 아마추어 천문협회 (KAAA) )_ 의 역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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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생략)...이러한 취지에서 우리나라 아마추어 천문의 초창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자코비니 유성우로 시작
1972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자코비니 유성우(유성들이 밤하늘의 한 점으로부터 무수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관측지로 지목되자, 일본에서 많은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나라 '체면상' 급조된 단체가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KAAA, the Korean Amateur Astronomers Association)였다. 그리하여 KAAA의 초대 회장에는 당시 '학생과학'을 발행하던 수송과학기술협회 회장 남궁호씨가 추대됐다. 그러나 고대했던 자코비니 유성우가 '소문난 잔치'로 끝나게 돼 일본의 아마추어들도 발걸음이 끊어지다시피 되어 KAAA는 흐지부지 돼버렸다. 천문학을 전공하던 어떤 분은 여자친구 부모님들에게 자코비니 유성우를 실감나게 선전했다가 유성우가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졸지에 '실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후 그분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KAAA는 그 후 몇 년간을 학생과학에 근무하던 윤실씨(현 Korea Times 근무)의 배려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1977년 윤실씨가 학생과학을 떠나게 되면서 회원 30여명의 KAAA는 해산위기에 처하게 됐다. 적자에 허덕이던 학생과학에서 더 이상의 지원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회원 중에는 국내 최고령아마추어 나은선씨, 새로운 방식의 자작 망원경을 연구하던 이만성씨(현 신탁은행 근무), 군에 입대하기 하루 전까지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오목거울(반사천체 망원경의 주경)을 연마하던 백기동씨(현 우성정밀광학 대표) 같은 분들이 있었지만, KAAA 운영에 직접 나서기에는 모두 생활에 너무 얽매인 상태였다.
당시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회원 10~20명은 '눈만 반짝거리며'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다 못해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반사 천체 망원경을 제작하여 팔던 계룡광학연구소를 찾아갔다. 계룡광학연구소는 1987년 문을 닫았지만 당시에는 사업이 번창해서 망원경을 구입한 사람들의 모임인 계룡아마추어천문회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규 소장(작고)과 유원준 기술부장(유 소장의 아들)에게 KAAA 실정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적어도 단체 안에서는 상업성을 띤 일을 배제하기로 약속하고 계룡 아마추어 천문회를 KAAA에 합병시켰다. ...(나머지 생략)
글 : 박석재 서울대 한국아마추어 천문협회 부회장
과학동아 199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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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본 적은 한번도 없었고, 친구들이나 형들이 어디에선가 빌려 오거나, 학교에 가져 오거나 하면 많이 읽었었다. (기껏해야 1년에 1-2권 정도?) 어떤 책은 형님이 사서 본 적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정도는 그 속에 있던 종이 비행기 접기를 내가 뜯어서 만들었던 적도 있는데, 남의 책을 뜯었다고 혼난 적이 없었으니까...
거기에 발행인이 _( 수송과학기술협회 )_ 라는 조금 이상한 이름을 가진 단체였었다. ( 과학기술을 수송한다고?? )
내가 책을 가끔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는 (중학교 쯤) 이 책을 발행하는 곳이 '중앙일보'로 바뀌었고, 그 이후로는 이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그냥 보통 어린이 잡지 정도(만화와 괴기등의 주로 꾸며졌던 것. 중요한 것은, 만화도 재미없는 내용으로..)로 바뀌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한번 사서 봤는데, 중앙일보로 바뀐 이후였고, 그 내용에 많이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몇년 지나지 않아 이 중앙일보의 학생과학 잡지 마저 볼 수 없게 되었다. 서점에서 사라진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이 수송과학기술협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자료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얼마전부터 구글 검색이 강력했지만, 궁금해질 때마다 검색을 했지만, 별다른 내용이 잡혀오지 않았었다.
오늘 인터넷에서 좀 다른 이름이지만 비슷한 이름인 _(수송 미디어)_를 접하게 되어서 다시 _( 수송과학기술협회 )_를 검색해 봤고, 지난번과 달리 약간 내용있는 정보를 찾아내게 되었다.
_(구글검색: 수송과학기술협회 )_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865 - 문화헌책서점 [학생과학 1980년 9월호 통권178호]
http://www.bookst.co.kr/shop/shopdetail.html?branduid=11202&xcode=013&mcode=004&scode=001&type=X&search=&sort=product - 동아 사이언스 기사 한국 아마추어 천문 20년 전국적 통합단체 절실한 시점 - 디라이브러리
http://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199102N021 - 1974년 2월 19일 중앙일보 기사
[출처: 중앙일보] 백호를 낸 『학생 과학』사장 남궁호씨
http://news.joins.com/article/1369639 - 학생 과학 창간10주 - 중앙일보 (10주년의 오타인 것이 분명하다. 인터넷으로 올리면서 발생한 오류로 보인다.) 라는 간단한 내용의 기사. (내용이 아주 간단한 기사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1419037
이 중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있던 내용을 아래에 복사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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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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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정보]
- 한자: 學生科學
- 분야: 과학/과학기술
- 유형: 문헌
- 시대: 현대/현대
- 성격: 잡지
- 제작시기:1965년 11월
- 간행/발행/발급자(처): 수송과학기술협회
- 집필자: 현원복
학생과학
서울에서 발행되는 청소년 대상의 종합과학 월간잡지.
1965년 11월 남궁 호(南宮浩)가 후원하고 사단법인 수송과학기술협회에서 창간하였다. 판형은 B5판이었다. 그 뒤 1984년 4월 1일 한국일보사에서 인수하여 1990년 4월 현재 통권 291호를 발행하고 있다. 현재의 발행인은 장재국(張在國)이며, B5판으로 336면에 별책부록을 내고 있다.
이 잡지는 우리 나라 학생과학교양지로 가장 오랜 연혁을 가지고 있다. 특징으로 창간 이래 매호마다 해외의 최신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화보를 싣는 한편 공작(工作)에 치중하여 독자들이 직접 만드는 과정을 통해 과학기술에 관심을 깊이 가지도록 이끌어 나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공작의 대상과 범위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것을 특징으로 들 수 있는데, 예컨대 천체망원경에서 자동차·배·비행기·일렉트로닉스·가정 등 공작에 이르고 있다. 또 실험관찰에도 역점을 두고 현직 중·고등학교 과학교사들이 잡지를 통하여 직접 지도하고 있다.
이 잡지는 해마다 가을에는 모형비행기 경기대회를 열어 청소년들의 공작의식을 부추기는 데 힘써왔으며, 여름방학에는 야외에서 천체관측캠프를 열어 청소년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다. 이 밖에도 대학의 이공계 교수들을 필진으로 하는 과학교양 읽을거리도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한편 독자들간의 유대감을 심기 위하여 ‘우리들의 마당’란을 두어 학생독자들의 발명품에 대한 지상강평, 질의문답, 과학도들간의 펜팔소개, 과학기재나 서적의 교환, 그리고 이 잡지에 대한 독자들의 소망 등을 싣고 있다.
이 잡지의 후원자인 남궁 호는 이미 대학 재학중인 1964년 과학도로서 ≪과학세기 科學世紀≫를 창간하였고 그 잡지의 휴간에 이어 다시 ≪학생과학≫을 발간하면서 재정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과학지의 후원을 계속해 왔다.
이 잡지는 최근까지 청소년용의 우리 나라 유일의 종합잡지로서 과학기술분야로 진출하려는 중학생들의 꿈을 가꾸어 주고 그들의 진로를 이끌어 나가는 데 주요한 구실과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 사단법인 수송과학기술협회
- 『한국과학기술 30년사』(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1980)
[관련시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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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중앙일보의 1974년 기사도 올린다. 내용이 너무 좋다.(ㅎㅎ)
1974년에 연간 7백만원이라는 적자라면, 엄청난 적자인 것이다.
좋은일을 하면서 이렇게 고생한 분이 있었다는...
백호를 낸 『학생 과학』사장 남궁호씨
[중앙일보]입력 1974.02.19 00:00『장차 이 나라의 역군이 될 어린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과 소양을 길러 주려는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고. 3월호로써 지령 l백호 특집을 낸 『학생 과학』 발행인 남궁호씨(32)는 간행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남궁 사장은 연간 7백만원 이상의 적자를 감수하면서 잡지 발행을 고수해 온 것은 『마땅한 놀이터 하나 없는 학생들이 좋지 못한 곳에서 용돈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과학 「클럽」 활동에 참여하고 유익한 잡지를 읽어 여가를 선용하면서 과학 기술 연구에 취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했다.
과학의 꿈과 소양을 길러 주려…|해마다 7백만원 적자를 참으며 9년째|대학생 때 창간… 손수 배달까지
65년 10월에 『학생 과학』 창간호를 냄으로써 일찌기 전국민 과학화 운동에 앞장서 온 남궁씨는 대학교(연세대 물리과) 3학년 때에 『학생 과학』을 창간하고 직접 삼륜차를 운전하여 잡지를 배달했다고 주위에서는 말한다.
『당시 학생이 잡지를 낸다고 하니 모두 다 응하지 않아 애를 먹었으나 열심히 설득하니까 결국 모두 협조해 주더라』고 어려웠던 초창기를 회고했다.
앞으로 역점을 둘 사업에 대해 남궁씨는 『학생들이 과학 기재를 직접 보고 부수고 만들 수 있는 학생 과학관을 세우고 학생 과학 「클럽」 활동을 적극 지원, 확장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과학 세계사는 이번 『학생 과학』 지령 1백호를 계기로 과학기술처 인가를 받아 사단법인 수송과학기술협회로 재출발, 『학생 과학』 외에도 과학 기술 서적 발간, 과학 기술 연구 발표회 및 강습회, 청소년 과학 「클럽」 활동 등에 더욱 힘쓰겠다고. 『그 동안 외부 원조 없이 해 왔지만 과학계 인사들의 성원 덕택에 용기를 얻었다』고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 지도 편달을 바란다』고 말끝을 맺었다. 남궁호씨는 남궁련씨의 외아들이다. <이운철 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호를 낸 『학생 과학』사장 남궁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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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동아 사이언스 라이브러리의 기사도 일부 발췌했다. 이것은수송과학기술협회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_( 한국 아마추어 천문협회 (KAAA) )_ 의 역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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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생략)...이러한 취지에서 우리나라 아마추어 천문의 초창기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자코비니 유성우로 시작
1972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자코비니 유성우(유성들이 밤하늘의 한 점으로부터 무수히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관측지로 지목되자, 일본에서 많은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나라 '체면상' 급조된 단체가 한국아마추어천문가회(KAAA, the Korean Amateur Astronomers Association)였다. 그리하여 KAAA의 초대 회장에는 당시 '학생과학'을 발행하던 수송과학기술협회 회장 남궁호씨가 추대됐다. 그러나 고대했던 자코비니 유성우가 '소문난 잔치'로 끝나게 돼 일본의 아마추어들도 발걸음이 끊어지다시피 되어 KAAA는 흐지부지 돼버렸다. 천문학을 전공하던 어떤 분은 여자친구 부모님들에게 자코비니 유성우를 실감나게 선전했다가 유성우가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졸지에 '실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후 그분은 여자 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다.
KAAA는 그 후 몇 년간을 학생과학에 근무하던 윤실씨(현 Korea Times 근무)의 배려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1977년 윤실씨가 학생과학을 떠나게 되면서 회원 30여명의 KAAA는 해산위기에 처하게 됐다. 적자에 허덕이던 학생과학에서 더 이상의 지원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회원 중에는 국내 최고령아마추어 나은선씨, 새로운 방식의 자작 망원경을 연구하던 이만성씨(현 신탁은행 근무), 군에 입대하기 하루 전까지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오목거울(반사천체 망원경의 주경)을 연마하던 백기동씨(현 우성정밀광학 대표) 같은 분들이 있었지만, KAAA 운영에 직접 나서기에는 모두 생활에 너무 얽매인 상태였다.
당시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회원 10~20명은 '눈만 반짝거리며'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다 못해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반사 천체 망원경을 제작하여 팔던 계룡광학연구소를 찾아갔다. 계룡광학연구소는 1987년 문을 닫았지만 당시에는 사업이 번창해서 망원경을 구입한 사람들의 모임인 계룡아마추어천문회를 가지고 있었다. 유진규 소장(작고)과 유원준 기술부장(유 소장의 아들)에게 KAAA 실정을 진지하게 설명하고, 적어도 단체 안에서는 상업성을 띤 일을 배제하기로 약속하고 계룡 아마추어 천문회를 KAAA에 합병시켰다. ...(나머지 생략)
글 : 박석재 서울대 한국아마추어 천문협회 부회장
과학동아 199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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